우편함을 열자, 코트 레터가 잠복하던 형사처럼 눈앞을 덮쳤다. 앗, 뜨거워라! 나는 벌건 군감자 껍질을 벗기듯 후후 거리며 봉투를 뜯었다. 교통 법규 위반 범칙금인가, 얼마 전 호놀룰루 폴리스를 우습게 알고 사거리 신호등을 무시했다가 카메라에 찍혀 벌금을 물곤 아직도 쓰린 가슴 그대로이다.
아니 웬 소환장? 부실한 영어 실력 탓으로 뒷글자는 아예 보지도 않고‘소환장(Summons)’이란 단어에만 꽂혀 조사 한번 없이 다짜고짜 법원 호출이라니, 황황이를 치면서 집으로 달려왔다. 퇴근한 아들 녀석이 자동 안마기에 파묻혀 있었다.
“얘얘, 이거 좀 봐라 코트에서 오란다!”
“이따 보면 안 돼?”눈을 감은 채 아들녀석은 귀찮아했다.
“얘가 지금 뭐래는 거야. 아빠는 달려가게 생겼는데.”
“… … 배심원 오라는 거잖아. 아바마마, 제발 좀 진정하세요.”
그러고보니 Summons 뒤에 ‘For Jury Service’라네. 배심원 요청 공문이 과거와 사뭇 다르다. 이전에는 해당란마다 쭈욱 체크해 내려가다 마지막쯤 ‘나는 원어민이 아니어서 영어를 잘하지 못합니다’ 하면 끝났었는데 구구절절 출석 강압으로 빼곡하다. 하긴 생활인으로서 원어민인들 배심원 호출에 선뜻 응하랴,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싶겠지. 그러니 법원으로서 더욱 그물을 촘촘히 짰으리라. 그래도 불출석 사유가 있으면 14일 전 이메일 하라네.
-소인은 한국인으로서 20여 년 미국 생활을 하고 있지만 가난뱅이 영어입니다. 특히 듣기능력이 턱도 없이 빈약하답니다. 이 편지도 식구의 도움으로 보낸다니까요. 선처해 주소서!
-귀하의 사연 잘 읽었습니다. 영어 이메일 도움을 준 식구와 함께 코트로 오세요. 소환된다고 다 배심원이 되는 건 아니고요, 우리 판사님이 고른답니다. 일단 오셔야 합니다.
더구나 레터 말미에 불출석 시 체포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지 않는가. 나는 트럼프의 하 수상한 이 시절, 만사 튼튼, 출석하는 걸로 마음을 굳혔다. 기왕지사 당당하게,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무엇이 자꾸만 쪼그라들고 있었다.
드디어 디데이, 바로 전날이었다. 어디다 주차하나,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는데 코트에서 파발마처럼 이메일이 날라왔다.
-경애하올 최 선생님, 내일 재판이 취소되었습니다. 오시지 마세요. 재판부 대신 협조해 주셔서 진심 감사드립니다.
비로소 나는 가슴이 활짝 펴지며 풀려난 인질처럼 푸른 하늘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