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좀 거창합니다. 각설하고, 저는 마른 오징어 눈을 좋아합니다. 오징어 눈 속의 깜장 각질을 물어 뜯어내며 먹는 맛이 일품이기 때문입니다. 별난 입맛을 갖게 된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제사나 명절 차례상을 준비하는 아버지는 마른포 오징어 눈은 떼서 버리셨습니다. 그때 얼른 주워 먹던 버릇입니다. 그시절 군것질, 주전부리라고는 눈 씻고 찾을 수 없을 때였습니다. 제사 후 오징어 다리는 커녕 구경조차 할 수 없도록 어머니께서 따로 간수하셨으니 눈알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전 데레사가 어디서 구했는지 오징어 눈을 한 움큼 버터에 볶아 주었습니다. 좋아라 뜯어 먹다가 갑자기 그시절 동생들 생각이 나자 저절로 안구에 습기가 차 올랐습니다. 아버지가 떼어 버린 오징어 눈알을 동생들도 먹고 싶었을텐데, 아무리 어렸어도 동생들의 심정을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어쩌자고 1도 몰랐을까? 급기야 저는 훌쩍 거리기조차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아버지가 버린 사과와 배 껍질도 제가 독차지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그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고, 이제 와서 동생들에게 미안했다고 빌 수도 없고, 아아!
그러나 제가 그렇게 나쁜 오빠나 형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기억도 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 수학여행을 갈 때 어머니께서 감귤 두 개를 넣어 주셨습니다. 당시 제주도에서 감귤 한 그루만 있으면 자식들 대학 뒷바라지까지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귀했던 시기라는 뜻입니다. 저는 그 귤을 도저히 혼자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생들이 생각났기에 말입니다. 물론 남겨와서 동생들과 나눠먹었는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욕심쟁이의 특징은 생각과 행동이 다를 때가 많지 않습니까.
오늘 요한이 전하는 부활 복음말씀, 이른 아침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막달레나가 울면서 달려와 누가 주님을 꺼내 갔다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와 베드로에게 하소연합니다. 아무래도 여기서 애제자란 요한 자신이겠지요(그래도 그렇지 자신을 대놓고 스승님이 사랑했다고 직설하다니, ^^). 경천동지할 급보를 접하고 역시 애제자 요한 답게 넘버 원인 베드로 보다 먼저 무덤에 다다릅니다. 그러나 들어가지 않습니다. 베드로에게 양보하고 뒤따릅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묵상 들어갑니다.
코로나 사태가 심각한 이탈리아의 한 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베라르델리 신부님(72세)은 신자들이 치유를 기원하며 선물한 산소호흡기를 얼굴도 전혀 모르는 한 젊은이에게 양보하고 선종하셨고 벨기에의 한 90세 할머니는 "난 충분히 살았다. 더 젊은 환자를 구하라"며 산소호흡기를 거부, 이틀 후 사망하셨다고 합니다. 또한 캐나다의 응급의사 골드만은 자신의 트위터에 자신이 코로나로 심각한 상황이 되면 심폐소생술을 거부하겠노라 적었습니다. 이유는 동료의사가 감염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자기도 필요한, 그것도 절실한 것을 이웃에게 내어 주는 장면을 보면서 보잘 것 없는 작은 것 하나라도 필요하면 선뜻 내어 놓지 못하는 저 자신이 많이 부끄럽습니다. 오늘 요한이 달리기에서 진 베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이런 작게 보이는 태도라도 우선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작지만 내어 놓는, 나누는 삶이 바로 부활의 삶이 아닌가 다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가까운 이웃 데레사를 위해 커피라도 한번 끓여 내 놔야겠습니다. 힘들지만 기쁜 부활 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뱀발: 위에 적은 오징어 눈은 '눈'이 아니고 '입'이라고 하네요. 여태 눈인줄 알고 먹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