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늘 각을 세우고 대립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의 한 무리가 바리사이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16,4)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태16,6) 이렇게 복음서에서 바리사이가 비판의 대상이 되니, 우리 교회 안에서는 바리사이를 마치 마귀들의 집단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를 무조건 나쁘게 매도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정체성을 가졌던 것이고, 그들의 병적인 콤플렉스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교회가 가진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는 말 그대로 ‘분리된’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학교에서 우열반을 가르듯이 바리사이들은 스스로를 영성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종교적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당시 평신도 영성지도자로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으로부터 비판을 받은 것일까요? 그들이 지나치게 율법주의에만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강박적으로 율법에 집착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하였고, 법은 보았지만 사람은 보지 못하였기에 사람을 위하여 강생하신 주님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사람을 치유가 필요한 이로 보셨지만, 바리사이들은 사람을 율법을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으로만 판단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리 마태오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는 바리사이들의 비판에 대하여,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9-13) 하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인간관과는 전혀 다른 인간관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구약율법을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쳤지만 그 입장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는 바리사이들처럼 지나치게 율법적으로 사는 이들을 ‘바리사이 콤플렉스’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지금 바리사이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바이러스는 여전히 남아 현대의 신자들까지 감염시키고 있습니다. 자기성찰은 하지 않으면서 눈에 불을 켜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캐는 사람, 말은 하지 않아도 마음 안에 늘 차가운 분노를 가지고 사는 사람, 새 신자들을 마치 자기 수하처럼 거느리고 자신이 영적지도자인양 행세하는 사람, 종교단체가 주관하는 단기간의 연수를 다녀와서 마치 자신이 신학적으로 또 영성적으로 대단한 인물인양 떠드는 사람, 미사 중이든 어떤 때든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사람, 성당의 자질구레한 일들에도 좀생이처럼 사사건건 나서는 사람, 본당신부가 자기만 특별히 대우해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리사이 콤플렉스에 감염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왜 이런 사람들이 생기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크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를 편히 하지 못하고 경직된 기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발달 시기 중에 항문기를 건강하게 보내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어릴 때 똥을 비롯한 지저분한 것들을 만지작거리고 노는 시기가 있는데, 그때 결벽증이 심한 부모님으로부터 지나치게 통제받고 야단을 맞으면서 지낸 경우 그 시절의 기억이 병적인 콤플렉스가 되어 어른으로 자라서도 사사건건 사람들에게 잣대를 들이대는 신경증적 환자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인생은 자기 파괴적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무너뜨리면서 자신의 마음도 무너뜨리는 모순된 삶을 삽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문제를 고치려고 하지 않을까요? 이들은 자신이 가진 병적인 문제를 다른 사람들이 알까봐 두려워서 종교적이고 외적인 치장에 엄청나게 공을 들입니다. 남들보다 기도를 배는 더 하던가 특히 단체로 하는 기도모임에서 유별나게 기도의 양을 늘려서 하는 정성을 보이고, 자신의 외적인 치장도 마치 전문 종교인인양 꾸밉니다. 때로 어떤 이들은 고위성직자의 외양을 흉내 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대개는 터줏대감처럼 행세하기에 아무도 감히 직언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런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다른 신자들이 자기를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희열을 느낍니다. 병적 심리 상태의 하나인 가학성 성격장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외적인 열심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의 암적 존재라고 불리는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3월호,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 가좌동 성당 주임)]